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누일 1세 (문단 편집) == 여성 편력과 기행 == 평생 한 여성만 사랑하고 가족에게 지고지순했던 선황 [[요안니스 2세]]와 달리 그는 많은 여성들과 추문을 일으키고 살아왔다. 첫 황후 [[줄츠바흐의 베르타]]는 외교적 역할은 톡톡히 해왔지만, 실제 가족 관계는 방치 수준이었다. 훗날 베르타의 사후에 새 장가를 들고 나서도 여러 사생아를 두었다. 테오도라 바타체스와 마리아 타로니테스 등의 당대의 미녀들과 관계를 가졌고, 이러한 정부들은 황궁에서 거의 황후와 같은 의전을 누렸고, 심지어 몇몇 사생아 아들들은 아들로 인정받아 부제 직위에 오르기까지 했다. [[마상창시합]]의 팬이었다. 콘스탄티노플뿐 아니라 안티오키아와 예루살렘에 있었던 시합에 직접 참가하기도 했으며 승수도 몇 번 딴듯. [* 위의 편력과 무쌍은 그의 시기에 로맨스나 서구 기사도적 문화가 동로마(정확히는 궁정)에 영향을 준 덕택으로 볼 수 있다. 단지 12사도와의 동격인 동로마의 수호자인 바실레우스로써가 아닌 서구의 낭만적 경향도 받아들여야 외교가 편했을 테니...] 또한 점성술과 의학에도 관심이 있었다. [[콘라드 3세]]가 [[2차 십자군]] 중 열병으로 낙오되었을 때 이를 직접 치료하기도 했고, 점성술적인 민간 요법과 사도를 따르기도 했다. 점술가들은 그가 장수할 것이라 했지만, 이 예언이 맞지 않자 지진, 가뭄 등의 이상한 예언으로 눈을 돌리게 해 자신들의 야매 점괘를 숨겼다고 한다. 동로마인들에게 있어 이러한 기행은 눈살이 찌뿌려지기 충분한 행위였다. 그럼에도 제국민들은 (결국 마지막이 된) 중흥을 가져온 성군의 일탈 정도로 치부했다. [[분류:마누일 1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